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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회사에서 신입사원에게 구몬 학습지를 시킨 사연

푸딩러 2020. 6. 13. 14:19

이 이야기는 내가 비즈니스 일본어를 공부한 방법에 대해 쓴 글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본어 수준은 어느정도일까?

일본 취업이 호황이라는데.. 그렇담 나도? 그런데 일본어 아예 못하는데.. 가능성 있을까? 어느 정도 일본어를 해야 합격하고도 문제 없이 일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드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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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언급했던 비즈니스 일본어 공부법은 아래와 같다.

1. 한자 자격증 공부하기 (+회사에서 쓰이는 용어를 모아 쓰기 연습장 만들기)

2. 전화 일본어 매뉴얼 외우기

3. 하루 종일 티브이 틀어놓기

 

대단치 않은 비즈니스 일본어 공부법이다. 요즘의 일본 회사 한국인 내정자들이 본다면 코웃음 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하다.

 

그렇다면 위의 1번부터 3번까지 방법만으로 비즈니스 일본어가 뚝딱 완성되었는지? 그렇지 않다.

비즈니스 레벨을 노리기에 앞서, 애초 내 일본어 실력은 일상 회화보다 더 부족한 수준이었기에, 그 부족함을 메우는 것부터 해나가야 했다.

 

 

그렇게 선택한 게 바로 '구몬' 학습지.

학습지라 하면, 눈높이나 구몬, 장원 한자 등. 초등학생 때 풀고 집에 오시는 방문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는, '어린이용'의 인상이 짙다. 한국은 대학생이나 직장인 등을 위한 어른용 학습지도 니즈가 있다고 들었는데, 일본은 그렇진 않다. 구몬이라 하면 보통 어린이용 학습지를 연상한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 함은, 교육을 받는 '장소'일 것이다.

한국 구몬은 선생님이 직접 집에 오시지만, 일본 구몬은 학생이 구몬 교습소에 가서 선생님을 만난다.

방과 후 교실처럼 스스로 학습지를 검사받고, 풀고,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고, 다음번 숙제를 받아 돌아간다. 

 

자취하는 좁은 집에 선생님이 온다고 하더라도 부담스러웠던 지라, 이런 스쿨 형식의 공부법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기초부터 탄탄히 하고 싶다는 목표와도 잘 맞았고, 구몬 교습소가 직장과 집 근처에 모두 있어서 접근성도 좋았다.

 

하지만 신입사원 월급으로 매달 학습지 비용과 교습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금액이 상당했다.

(구몬 의외로 비싸더라)

 

구몬 교습소 장소, 내가 배울 수 있는 레벨, 금액 등 이것저것 사전조사를 먼저 했다.

그리고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정쩡한 내 일본어 실력에 같이 고민했던 매니저(상사)에게 구몬 이야기를 꺼냈다.

과목은 한자, 당시 나는 초등학교 레벨을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초등학교 6학년까지 코스를 끝내는 데 드는 기간과 비용을 구체적으로 가져갔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기에 외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실 등 학원이나 프로그램이 마련돼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구몬?" 하면서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던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주었고, 예산은 있으니 최종 승인을 위한 결재서를 제출해보라 하였다.

 

그때 작성한 결재서가 회사 생활하며 처음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내 인생 첫 결재서가 구몬 학습지라니.

그 뒤 매니저가 직접 윗 부서에 가서 설명과 함께 제출을 하고 왔고 며칠 뒤 승인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전액 회사 지원으로 구몬 학습지를 풀 수 있었다.

 

초등학생 수준의 한자조차 제대로 모르는 신입사원을 위해 회사 경비로 학습지 공부를 시켜준다니. 당시에는 파격적인 회사의 지원에 감동했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약속했던 달수는 3개월.

그 후 매주 2번, 월요일과 목요일은 정시 퇴근, '구몬 가는 날'이 되었다.

 

회사 퇴근하면 그대로 회사 근처 구몬 교습소에 가서 숙제를 제출하고, 선생님이 채점해주는 동안 그 날 정해진 분량을 풀고, 틀린 문제가 있다면 고치고. 다음번 숙제를 받아왔다.

 

어린이 학습지라 교습소에는 늘 초등학생, 크더라도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저녁 7시 즈음 늦은 시간, 정장 차림으로 회사에서 막 퇴근한 칙칙한 직장인이 제일 뒷자리에서 학습지를 푸는 풍경이 마냥 신기했을 거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아이들의 힐끔 거리는 시선이 많이 민망했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감당하고 꿋꿋이 앉아서 문제를 풀고, 틀린 문제를 고치며 다음번 숙제로 두둑해지는 내 가방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약속했던 3개월이 다가왔다. 구몬 선생님은 내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 연장해서 공부를 이어가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마음 같아선 연장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 금전적 여유 모두 없던 때였기에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하고 그렇게 구몬 학습지는 짤막하게 끝이 났다.

 

그렇게 학습지까지 풀며 공부했다지만 한자는 아직 많이 약한 과목이다. 그건 정말 인정한다.

그래도 일본에 온 직후 회사에서 시켜준 덕분에 구몬 한자를 수강하며 원하던 대로 부족한 기초를 메꿀 수 있었고, 그러기에 당시 병행했던 비즈니스 일본어 공부법도 효과가 컸다고 본다. 

 

당돌하게 학습지를 하고 싶다던 외국인 신입사원에게 과감하게 투자해 준 옛 회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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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 한국토종으로 일본 현지 외국계기업에서 인사담당자(HR)로 근무중인 회사원입니다. 외국인의 시선, 인사담당자의 시선으로 보통의 일본생활에 대해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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