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쓰는 편지

푸딩러 2020. 6. 13. 14:16

엄마.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일지도 몰라요. 

그냥, 한국에 있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져서 쓰는 편지니까 그러려니 하고 읽어주세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 서른에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지, 결혼은 몇 살쯤 누구랑 할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을지.

무엇하나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지 못했어요.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사는 것도, 저는 상상해보지 못했어요.

어른이 되어 떨어져 사는 것도 상상해본 적 없어요.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 엄마가 다려주는 교복, 엄마의 모든 뒷바라지가 제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어요.

이 시간들에는 끝이 있다는 것, 그것도 모르고 저는 제 멋대로 고집불통인 딸이었어요. 

이제와 서야 그걸 후회합니다.

 

하지만 스무 살,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서 홀로 살이를 했고 그제야 엄마가 없는 제 일상을 마주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창피한 일인데요,

세탁기 돌리는 방법, 추운 겨울 방 보일러 켜는 방법 등 저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정리정돈도 제대로 못했고요. 

 

몇 년 뒤 친구랑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생활에 대한 개념을 자연스레 익히게 된 거 같고요,

정리정돈이나 집안일도 스스로 하게 되었어요.

 

저는 이때를 후회해요.

인생에서 가장,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때는 이때가 유일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생. 

대학생활 4년을 하며 왜 더 자주 엄마 아빠를 만나러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요?

방학 때 일주일 정도 내려간 게 전부였죠.

그마저도 학회나 동아리, 봉사활동 같은 활동으로 바쁘다고 서두르며 올라간 기억밖에 없어요.

 

그때부터였을까요.

지금도 엄마 아빠는 제가 고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이번엔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 하고 물으시지요.

 


기분 좋은 생각이 하고 싶을 때, 저는 아직도 초등학생 때 갔던 가족 여행을 떠올려요.

여름방학이 되면 안동, 보성, 전주 등 아빠 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가족끼리 다녔잖아요. 

창문을 살짝 내리면 들어오던 적당히 선선한 여름 바람, 차 안에서 같이 듣던 DJ DOC 음악, 다 함께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 중간중간 들린 휴게소에서 사 먹던 핫바.

 

기억력이 안 좋은 제가 이상하게도 그때 기억은 노력하면 잘 나더라고요.

 

 

기분 좋은 생각이긴 한데요, 다시 바로 슬퍼지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전국을 누비는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처음에 약간 서운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래도 축하한다고 말씀해주셨죠. 늘 응원한다고.

 

입사하고 첫 3개월,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저를 버티게 해 준 건 엄마가 연말에 절 보러 가겠다고 했던 그 한 마디였어요.

 

일주일에 두 번, 것도 서울 직항밖에 없던 일본의 시골 공항까지 약속대로 엄마는 오셨어요. 

 

제가 혼자서 살림 못 지내는 걸 아시고,

짐 가방 안에는 옷가지 대신 직접 만드신 밑반찬들을 가득 채워오셨어요. 

오래간만에 엄마표 곰국을 끓여주고 싶었는데 곰국은 비행기에 반입 안 되는 줄 몰랐다며 멋쩍게 웃는 엄마를 보고 가슴이 먹먹했어요. 비행기가 익숙지 않으니 액체류는 반입이 안된다는 거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 엄마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을까. 

혼자 공항에서 짐 가방을 들고 길 헤맸을 생각을 하니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타지에서 씩씩하게 있어 보이고 싶어서 꾹 참았어요.

 

가까운 듯 가깝지 않은 일본 타지 생활, 익숙하지 않은 회사, 모든 게 낯설었고 적응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 길게만 느껴졌어요. 왜 내가 한국에 모든 걸 놓고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내린 선택을 원망할 때도 있었어요.

 

딸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는 우리 엄마.

그런 엄마한테 너무 힘든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엄마는 먼저 전화를 걸어왔어요. 

 

내가 당신의 자랑이라던 그 한 마디. 알아서 잘 커줘서 너무 고맙다는 그 말.

 

그 말을 듣고 저는 다시 주저앉아 있다가도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났어요.

 

원하던 곳에 합격해서 이직하게 되었을 때, 회사에서 성과가 좋아서 칭찬받았을 때, 누구보다 먼저 엄마한테 제일 먼저 얘기하고 싶었고 제가 찾을 때마다 엄마는 항상 그곳에 계셨어요.

 

이직하는 곳은 엄마도 알 정도의 대도시였고 그곳에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시며 가장 먼저 하신 말은

무엇보다도 "이젠 집에 자주 올 수 있겠다"는 한 마디였어요.

그 간 일 년에 한 번도 제대로 못 보고 지내며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이 한 마디에서 엄마의 감정이 전해져 왔어요.

 


자주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하늘길이 막혀서 못 본 지도 반년이 넘었네요.

 

관광비자가 발급이 안되니 엄마 아빠가 일본에 못 오는 건 물론이고, 제가 한국에 가려고 하더라도 일본을 나가는 순간 비자가 무효화돼버려서 일본에 못 돌아가게 되어요.

 

그러기에 지금은 일본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네요.

 

원래 예정대로라면 저번 주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아빠 손을 잡고 입장했을 텐데, 결혼식은 결국 무기한 연기됐잖아요. 많이 속상하셨죠. 

그리고 이번 달 한국에서 가족끼리 찍기로 한 결혼 스냅사진, 저희 부부가 한국에 못 가는 바람에 그 조차 취소되었죠. 

 

엄마가 많이 기대하고 기다리셨는데, 괜찮다며, 속상해하지 말라며 오히려 저를 다독여주시는 우리 엄마.

 

엄마를 못 만나는 사이,  순간순간, 지금도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간들이 저는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 시국을 만든 코로나를 원망하게 되네요.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나고 있는 우리 같은 가족들이 한 둘이 아니래요, 엄마. 모두가 함께 인내하고 견뎌내는 수밖에 없겠지요.

 

지난 시간들 속에서 후회하는 것, 못 다해 드린 것들이 너무도 많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다음번에 공항에서 만나게 되면 어떤 말 한마디보다 그냥 엄마를 꼭 안고 싶어요.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올해 안에 얼굴 한 번 볼 수 있긴 할까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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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 한국토종으로 일본 현지 외국계기업에서 인사담당자(HR)로 근무중인 회사원입니다. 외국인의 시선, 인사담당자의 시선으로 보통의 일본생활에 대해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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