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었을 때. 약 4년 전 일이다.
나를 담당하던 사수는 40 초반의 젊은 차장, H상.
홀로 일본, 것도 도시가 아닌 곳으로 왔기에 H상은 회사일 외에도 집 구하기, 가구 사러 가기 등 꼼꼼하게 나를 챙겨주는 든든한 상사였지만 일에 있어선 한없이 엄격한 사람이었다.
당시 내 첫 번째 회사는 제조업 회사로 현(県) 내 여러 곳에 생산공장이 있었다.
인사과가 있는 본사에서 가장 먼 곳은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었다.
한국 운전면허증은 있었지만 실제로 운전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채용 면접, 공장장/사원 면담, 공장 견학 안내 등으로 공장에 갈 일이 잦았고, H상은 내가 길을 완벽하게 외우길 바랬다.
처음 1시간 거리 공장에 같이 갈 때 말하길,
"앞으로 정기적으로 가야 되는 곳이니까 두 번 정도 같이 가고, 세 번째부턴 혼자 갈 수 있도록 잘 외워둬."
안타깝게도 내가 두 번만에 길을 외울 수 있을 리 만무했고, 한 달쯤 되어 나 홀로 공장에 가야 할 때가 다가왔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인사과 직원들도 걱정이 되었는지 구글맵을 복사해서 사인펜으로 길을 그려주는 등, 나를 구해주려 했지만 나는 반포기 상태였고 일단 부딪혀보자는 식으로 출발했다.
출발하기 직전에 필사적으로 구글맵을 머릿속에 넣으려고 애썼던 탓인지, 의외로 순조롭게 갈 수 있었다.
(물론 갈림길에서 두세 번 잘못된 선택을 해 조금 헤매긴 했다.)
어떻게 시간 내 도착이 가능했고, 인사과 업무도 다 봤다.
10월. 날도 선선하니 하늘도 높고 일도 잘 풀리고 기분이 좋았다.
조금 들뜬 기분으로 본사로 돌아가는 길을 운전했다.
이번에는 욕심 내서 중간에 편의점도 들렸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슬슬 고파와서 달달한 걸 먹고 싶었던 탓이다.
세븐일레븐에서 바움쿠헨이 개별 포장되어있는 봉지 과자를 샀다.
과자까지 사고 좀 더 들뜬 맘으로 도로변에서 정지 신호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도중 보조석에 있는 과자에 손을 뻗었고, 순간 브레이크에 올려둔 발에 힘이 풀렸다.
쿵.
앞에 있는 자동차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4차선까지 있는 큰 도로변이었고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일단 내려서 사과부터 꾸벅꾸벅했다.
미니밴 운전수는 60~70대 정도의 남자분이었고 그분도 놀래셨는지 얼른 같이 내렸다.
부딪힌 자국을 확인하더니, 허허 웃으시며 "딱히 자국 남은 것도 없네요 뭐.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라고 하셨다.
짧은 일본어로 사과하고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리고 나중에 무슨 결함이라도 나면 연락 달라고 내 명함을 드리고 다시 차에 올라 운전해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무슨 정신으로 운전해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무사히 본사로 돌아와, H상에게 길을 헤매지 않고 다녀왔지만 중간에 가벼운 접촉사고가 있었고 괜찮다는 상대방의 말에 명함만 드리고 일단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H상의 얼굴색이 싸악 변하면서 화내기 시작한다.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는지, 왜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는지.
상대방이 내 명함을 이용해서 나중에 경찰에 신고하고, 그게 회사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 못해봤냐며 질책했다.
일본에선 교통사고가 나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게 아니라 일단 무조건 경찰을 부른다고 한다.
(일본에 온 지 한 달도 안된 내가 알 리가 있나.)
H상에게 전화해서 보고하지 않은 건 내가 백번 잘못한 일이다. 일본 사회인이라면 유명한 '보고/연락/상담'(報連相, 호렌소)를 지키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또 가장 잘못된 행동은 과자에 한 눈 팔려 발에 힘이 풀린 것이다. 백 번 탓해도 모자라다.
당시에는 크게 혼나고 사건은 일단락되긴 했다. 미니밴 운전수한테 따로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던 상식으로 일본에선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낀 날이었다.
한 달 정도 일본에서 지내며 회사생활도 주변 생활도 적응한 듯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행자의 시선으로 머물러 있던 내겐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참 아찔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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