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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보여준 일본 회사의 민낯-수작업의 나라, 일본

푸딩러 2020. 6. 4. 21:46

믿거나 말거나, 일본 미디어에 따르면, 코로나 19는 요즘 안정적으로 잡혀가고 있는 추세라 한다.

 

2020 올림픽 연기가 결정되기 전인 3월의 일본을 떠올린다.

 

전 세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일본 미디어에서 알려주는 감염자 수는 많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에이, 우리 건물에 코로나 감염자가 설마 있겠어?'라며 수군대는 정도였다.

아침 출근 지하철은 가방을 품에 안고 타야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붐볐다.

 


 

상황은 갑자기, 빠르게, 흘러갔다.

 

전 국민이 좋아하고 후배들이 존경하는 개그맨이 코로나로 사망했다.

미국, 이탈리아 등 코로나가 급속도로 퍼져나가 록다운을 시작했다.

올해 올림픽은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였고 현실이 되었다.

아베 총리가 '긴급사태 선언'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4월 초 일본 전국에 긴급사태 선언 발령이 났고, 우리 회사도 재택근무로 돌입했다.

강제성이 있는 재택근무는 아니었지만 매일 보도되는 심각한 뉴스를 들으며 제 발로 출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인사 이동은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로, 급여팀(Payroll)에서 채용팀으로 이동했다.

 

이 시국에 극과 극의 업무량인 두 곳에서 인수인계받아가며 해가며 재택근무를 했다.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되고 사원의 8할 이상이 자택 대기를 하고 있지만 월급은 문제없이 지급되어야만 했다. 

회사로선 월급 차감 없이 100% 지급한다는 원칙이었다.

 

평소에 당연시하며 월급날 명세서도 제대로 보지 않는 사원들이 이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100% 제대로 지급되는지, 지켜보는 상황이 된 거다. 

4월은 인사이동, 승급, 인사고과 반영 등 이벤트가 많은 달이었다. 

계산에 실수는 없어야 했다. 

 

 

반면, 채용팀은 어떤가. 코로나로 대면 면접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회사 기능이 정지되었기에 잉여 인력이 많아 거의 대부분 자택 대기를 시키는 추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을 뽑는다는 건 어불성설. 

채용팀은 기능이 올 스톱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일본 회사의 민낯을 온전히 보는 경험을 했다.

 

 

인사 이동은 했지만 급여팀은 일손이 필요했고 채용팀 기능이 정지되었기에 당분간 9할 이상을 급여 계산 업무에 썼다. 급여팀은 종이를 많이 쓰는 팀이다. 모든 서류를 종이로 처리한다. 메일로, 데이터로 받아도 굳이 프린트 아웃을 해서 펜으로 체크하면서 종이로 기록을, 증거를 남겨둔다. 

 

재택근무가 시작되니 종이로 처리하던 업무들은 PDF로 변환해서 집에서도 볼 수 있도록 팀원들과 함께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예정대로 PDF를 참고하며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라, 이상하다? 나랑 일하는 페이스가 다르고 사무실에서 금방, 어느 자료라도 바로 보고있는 것처럼 자료 확인요청에 대한 반응이 빨랐다.

 

혹시나하고 물어보니 오늘은 출근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내 사수를 비롯한 팀원들이 전원 출근해서 종이로 업무를 본단다.

집에서 데이터를 보면서 할 예정이었지만 

1. 회사만큼 집중이 안된다. 2. 역시 종이가 편하다. 3. 종이로 직접 봐야 안심이 된다,

는 이유로 이 무서운 코로나를 뚫고 굳이, 굳이 출근을 해서 종이를 만지고 있는 거다.

 

결국 4월도, 5월도 급여팀 사람들은 매일같이 정상 출근해서 종이를 보며 업무 처리를 했다.

 

일본 정부에서 재난 지원금으로 1인당 10만 엔씩 지원을 하는데 신청에서 지급까지 처리 절차가, 급여팀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것 없다. 국민들이 데이터로 신청을 해도 굳이 프린트 아웃을 해서 종이로 한 번 더 확인을 한다. 

 

탈종이화(Paperless)를 외치며 데이터로 이행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었지만 팀 내에서 원활하게 운용되지 않는 이유를 다시 한번 알게 됐다.

 


 

그렇다면 채용팀은 어떨까?

 

대학생 때 인사의 꽃은 채용이요, 채용 담당자들은 샤프하고 프로페셔널하고 뭔가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채용팀도 다를 것 없었다. 업무 자체가 없다 보니 종이 얘기는 둘째 치더라도, 팀장이 팀원들에게 분장하는 업무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모든 업무에 대한 매뉴얼 작성을 시킨다는 것.

 

예를 들면, 채용팀 전용 이메일 계정 로그인하는 방법(참고로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는 구글 계정이다), 채용 이벤트가 있을 때 챙겨가야 할 필기도구 등 상식적으로 스스로 생각해서 할 수 있는 업무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약 50개 정도의 매뉴얼 작성을 팀원들에게 분담했다.

 

그 팀원들과 팀장 사이의 직급이 내가 위치한 곳인데, 팀장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팀원들의 모티베이션이 걱정됐다. 그리고 '소소'하다기엔 너무 '소소'한 매뉴얼을 작성하는 팀원들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함을 느낀 건, 팀원들과 대화를 해보니, 업무를 함에 있어 매뉴얼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는 점은 공통적으로 인정하더라는 것. 일반화는 위험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이 '매뉴얼'을 사랑하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와중에 내가 한 업무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정작 내 포지션에 대한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받아서 발언권이 없는 이도 저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5년 가까이 일본 회사에서 일해 오면서 이렇게 제대로 비효율적인 업무와 업무 방식들을 보고 겪게 된 건 코로나가 비춰준 민낯이겠지.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사원수가 제법 되고 그중 인사과 자체도 덩치가 크다 보니 일정 이상의 업무 퀄리티를 기대하기 위해 매뉴얼을 작성시키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래도, 그래도.. 아이디어는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채용 법안 관련 스터디를 연다 거나, 기존 채용 선발 과정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대폭 개선하거나, 앞으로 코로나로 변할 채용 방식의 대응을 위한 여러 안들을 생각하고 토론해보거나.. 

 

지금은 자택 대기가 해지되어 출근하고 있지만, 두 달간 매뉴얼을 작성해준 팀원들에게는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일의 효율화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팀원들이 작성한 매뉴얼을 읽으며 하루의 업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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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 한국토종으로 일본 현지 외국계기업에서 인사담당자(HR)로 근무중인 회사원입니다. 외국인의 시선, 인사담당자의 시선으로 보통의 일본생활에 대해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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